앞머리를 자를까 기를까?
한 달에 한번씩 하는 고민이다.
희한하게도 미국 여자들은 한국에 비해 짧은 앞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
아마도 동양권에서는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여성상이 오랫동안 선호되어 온 것에 반해, 미국에서는 세련되고 핫한 느낌의 여성이 매력적이라는 관념이 퍼져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앞머리가 있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해왔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한 번 자른 이후로 앞머리를 기르는 과정에서의 거지존을 참지 못해서
2) 내 얼굴에는 앞머리 있는 스타일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놀랍게도 더 어려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앞머리에 비해 머리 전체 기장을 자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적은 편이다.
미국에 나오기 직전에 아주 짧은 단발로 머리를 자른 이후로, 미국 내에서는 원시인처럼 머리를 기르기만 하고 있다.
일단 미용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맨해튼 일반적인 살롱에서 여자 헤어펌 가격은 거의 200~300달러부터 시작인데 기장 추가, 클리닉 추가, 25% 팁 추가 생각하면 못해도 50~60만원은 깨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의 미적 기준(?)이 한국과 다르다보니, 왠지 내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절대 안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직도 미용실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앞머리만은 집에서 내가 직접 자른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나와 같은 헤어 스타일이 매우 드물다 보니 '나도 그냥 앞머리를 길러서 없애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서른중반의 나이에 앞머리+긴 생머리는 너무 위화감이 드나?' 라는 생각도 자주 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아주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백인 할머니께서 백발의 머리를 쨍한 보라색으로 염색하고 구부정하게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 할머니에게서 그 어떤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 뉴요커들보다도 훨씬 멋진 아우라를 느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나이임에도 나는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
감명을 받은 나는 바로 옆에서 걷던 남편에게 말했다.
"우와 나도 저 할머니를 본받아서 나만의 스타일대로 하고 다니겠어!"
그리고는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란 것이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냥 나의 직위와 나이와 타인의 시선에 맞춰 적당히 괜찮아 보이고 무난해 보이게끔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그러고보니 미국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전혀 상관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하고 다니는 사람이 정말 많다.
뱃살을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딱붙는 나시탑을 입고 다니거나, 남자이지만 아주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레깅스를 입은 채 조깅을 하는 노인분들도 많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나도 조금씩 남들의 시선에 대해 둔감해져 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옷 스타일을 갑자기 바꾸려는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앞머리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가 많다고 앞머리를 없애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저기 보라색 머리 할머니도 아주 멋있게 거리를 활보하고 계시는데 이깟 앞머리가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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