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날씨가 시작되면 잔디밭에 눕기 시작하는 뉴욕 사람들.
특히, 브라이언트 파크의 잔디밭은 5월부터 대중들에게 개방되는데, 그와 동시에 많은 인파가 잔디밭에 눕거나 앉아서 따뜻한 날씨를 즐기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대충 손수건이나 담요를 깔고 앉기도 하고, 그냥 맨 몸으로 누워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인구 밀도가 높고 수다 소리로 시끄러운데 아이러니하게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봄날의 잔디밭.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느껴지는 그것과는 또다른 결의 여유와 평화로움이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잔디밭은 사방이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곳인데 이 빌딩숲 사이의 조그마한 잔디밭에서 웃통을 까거나 수영복에 가까운 차림으로 선탠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언밸런스함에 시시각각으로 미시감이 든다.
하지만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반대로 타인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본인 각자의 여유와 유희를 즐기는 뉴요커들.
어제 비왔는데 잔디밭 축축하지 않나를 먼저 걱정하는 나만 아직도 뼛속깊이 한국인인가보다.
카메라의 한 앵글에 정말이지 다양한 무드의 사람들이 잡히는 것도 참 재미있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신경 쓰지 않으며 주말을 즐기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시간 보내기' 방법이다.
이렇게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느껴지는 또 한가지.
이 곳의 대부분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때문에 아주 다양한 인종이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공원 테이블에 혼자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면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게 된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혼자 살고 있는 회사원이 주말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그리운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러 전화를 하고 있겠구나.
나와 같은 처지의 외지인이겠구나.
그러면 희한하게도 동질감과 함께 묘한 심리적 위안마저 드는 것이다.
스팅의 노래 중 'English man in new york'의 가사 한 구절이 생각나는 오후였다.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누가 뭐라하든 당당해지자)
oh, I'm an alien, I'm a legal alien (나는 이방인, 합법적 이방인이야)
뉴욕에 와서 살면서 '이곳에 완벽히 녹아들어 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이방인이 90% 이상인 이 도시에서 나는 실체가 없는 바보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일과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나 이 커다랗고 복잡한 도시에 와서 살고 있는 외지인들인데, 내가 이들 사이에서 위축되거나 적응하려 노력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애초에 내가 적응해야 할 것조차 없는, 외지인들의 도시였구나.
나도 주눅들지 말고 좀더 당당하게 살아야 겠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수영복을 입고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는 저 수많은 다른 이방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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