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리버 근처에 살고 있다.
월세가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가운데, 운 좋게 남편의 직장을 통해 하우징 시스템을 보조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맨해튼의 아파트들은 악명 높은 월세 치고는 아주 허름하고 낡고 더럽다.
특히, 맨해튼 중앙의 센트럴 파크와 멀어질 수록 집이 더 좁고 더러운 골목이 많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트 리버 근처에 살기에 얻을 수 있는 일상의 특별함이 있다.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의 강가 쪽에는 이스트 리버를 따라서 쭉 산책로가 나 있는데, 이 곳을 걸으면 맞은 편의 아스토리아, 루즈벨트 아일랜드, 롱아일랜드시티를 모두 구경할 수 있다.
곳곳에 벤치가 많이 비치되어 있어서, 중간 중간 앉아서 경치와 배와 사람과 개들을 보며 시간을 떼우곤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시간이 있어도 왜 산책을 많이 안 했을까 떠올려 보니, 첫째로는 이렇게 경치 좋은 산책로가 내 거주지 근처에 없었고, 둘째로는 비루한 나의 다리와 체력을 보조해 줄 벤치들이 많이 없었다.
날씨 좋은 주말이 되면 남편과 함께 느지막히 브런치를 먹고 집 앞 강가 공원을 거니곤 하는데, 조깅 하는 사람, 개 산책 시키는 사람, 벤치에 앉아 책 읽는 사람 등 주말을 강변에서 여유롭게 보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나의 주말은 늘 일할 것들 또는 놀 것들, 먹을 것들, 만날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뉴욕에 살게 된 이후로는, 이런 것들의 결핍으로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물론 친구들과 가족들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심에서 놀거나 외식을 하면 높은 물가 때문에 너무 많은 비용이 지출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원이나 강변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햇살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뉴요커들이 괜히 베이글을 사서 센트럴파크 벤치에 앉아서 먹는 게 아니다. 집 렌트비로 월급의 많은 부분을 내야 하는 뉴요커들이 여유 시간을 보내기에는 그게 가장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 의견입니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서 또는 잔디밭에 누워서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이후로 나의 주말 오후는 더욱 풍요로워진 느낌이 든다.
결핍이 오히려 여유를 유발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뉴욕은 흐린 날 더욱 그 도시의 매력이 극대화되는데, 흐린 날의 강변도 그 정취가 엄청나다.
연초에 개인적으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었는데 어느 흐린 하루, 집 앞 강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묵묵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생각지 못한 위로를 받았다.
"OO야, 궂은 날이 있어도 너의 인생은 계속 흘러갈 거란다."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이 전하는 묵직한 위로를 받으며 긴 시간 강가에 앉아 있었고, 그 이후로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을 찾았던 것 같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노래의 '강변 살자'의 의미는 단지 배산임수와 좋은 환경, 높은 집값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바다도 아니요, 시냇물도 아닌, 천천히 크고 깊게 흐르는 강물만이 줄 수 있는 여유와 치유의 힘을 발판으로 내 인생을 더욱 잘 어루만지며 살아가자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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